“위암도 당황스러운데 복막전이까지 되었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유전자검사를 받았는데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암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서경제(55·가명)씨는 몇달째 소화가 되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가 복막전이를 동반한 4기 위암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가 40대에 위암으로 사망했던 터라 서씨의 충격은 더욱 컸다. 복막전이가 일어나면 통상적인 위암보다 예후가 더욱 나쁘다. 복막이 위, 소장, 대장을 비롯해 간, 담낭, 췌장, 방광 등 복강 내 여러 장기를 싸고 있어 수술은 커녕 방사선치료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복막으로 가는 혈관이 많지 않아 항암제가 복막 안의 암세포까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해 항암치료 효과도 떨어진다. 복막을 따라 암세포가 자라면 장이 붓고 주변 장기의 기능이 저하되어 치료를 지속하기 힘든 악순환이 시작된다.
권민석 아주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서씨에게 '전장유전체분석(WGS·Whole Genome Sequencing)' 검사를 권했다. 암조직에서 얻은 유전자를 분석해 암의 생장에 중요한 돌연변이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2주만에 나온 암유전체 프로필을 토대로 서씨에게 생긴 위암의 원인이 '브라카(BRCA) 유전자'였음을 알아냈다.
BRCA는 유방암을 뜻하는 'BReast CAncer'에서 따온 명칭으로 유전성 유방암과 연관성이 높다. 어머니가 난소암, 이모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던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유전자검사에서 BRCA1 돌연변이를 확인하고 37살의 나이에 암 예방을 위해 양쪽 유방을 절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BRCA1 또는 BRCA2 유전자에 변이가 있으면 유방암 외에도 난소암·전립선암·췌장암·대장암·담낭암 등 유전성 암에 걸릴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위암에서 BRCA 변이가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의아해 하던 권 교수는 가족력을 조사하던 중 서씨의 50대 누나와 30대 조카가 BRCA 변이 관련 유방암 진단을 받았음을 확인했다. 암 병력이 없는 서씨의 50대 남동생도 WGS 검사 결과 BRCA1 유전자가 발견됐다. 아직 암이 발병하진 않았지만 유전성 암이 생길 확률이 매우 높은 고위험군임을 잡아낸 것이다.
권 교수는 “WGS 분석이 아니었다면 남성 환자에서 BRCA 유전성 위암을 의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BRCA 돌연변이에 반응률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면역항암제를 병용 투여한 결과 암크기가 현저하게 줄었다”고 설명했다. 암을 일으킨 원인 유전자에 대한 정보가 치료성적 향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서씨의 남동생 역시 유전상담을 받고 정기 추적검사를 받으면서 BRCA 변이와 연관된 암 발생에 대비하고 있다.